온전한 기억

2015.04.10 02:38 from Essay

 

 

예전처럼 사진을 찍고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치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라고 자위해보지만 가끔은 깜짝 놀라 섬뜩해진다. 하루를 온전한 기억으로 남겨 두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날이 쌓여가고,래서 시간 참 빠르다고 환갑을 앞둔 어른들 마냥 되뇌이곤 할 때. 문득 무서워진다. 난 지금 허투루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천십오년 사월 구일은 아름다운 날이다. 완연한 벚꽃과 함께 당신의 맑은 미소를 이렇게 담아냈으니. 손을 잡고 팔짱을 낀 채 걸었다. 당신의 봄을 머금은 냄새가 그려지고, 익살스러운 순수함이 떠오른다. 함께 나눈 사진에 대한 이야기와 국제관계, 노동문제에 관해서도 마치 대본처럼 생생하게 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침 터져나왔던 분수의 장엄함을, 벚꽃 아래서 아이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애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오늘의 모든 순간에 대해선 허투루 살지 않았음에 이리도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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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5.04.10 22:01

    비밀댓글입니다

 

이제 늦게 일어나도 된다. 내일 지각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 틈틈이 책장에 쟁여놨던 하루키와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읽으며 밤을 새도 될 것이고, 내내 벼르고 벼렸던 히치콕 시리즈와 왕좌의게임으로 하루를 탕진해도 될 것이다. 게다가 쓰겠다고 말만 해서 이제는 거짓말이 되어버린 글쓰기도 야심차게 시작해도 된다. 그렇게 한량에 대한 그리움과 인턴기자라는 이름이 주는 두통에서 벗어난 후, 남은 것은 단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여섯시 반부터 오 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모두 지우며, 앞으로 한 달 동안 읽을 책과 쓸 글들을 적어보며,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시작할 취미생활을 떠올려보며 단지 남은 건 행복이라고 상상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일곱 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공포가 베인 공허함을 느꼈다. 네 달간의 인턴생활이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각인이 된 것 일수도. 혹은 기자로서의 치열한 삶이 아닌 다른 무언가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오늘 아침은 무얼 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어린 아이 같았다. 앞으로도 무얼 말해야할지, 무얼 읽어야할지, 무얼 써야할지 모르는 그런 시시한 어린 아이.

 

S의 말대로 나는 뉴욕에 갔어야 했을까. 단순하게 가야 할 이유,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써 본 다음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그런 알고리즘에 따른다면 난 지금 뉴욕에 있어야 한다. 크리스마스 때 S와 블루노트에 있는 상상만큼 설렘을 주는 일은 없으며, 뉴욕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 따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알고리즘을 내 앞에 두기에는 에너지가 없다. 뉴욕 가는 건 한 달 뒤에 다시 생각해보자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텅 빈 주머니 사정 걱정해가며 뉴욕에서 지낼 일을 상상하는 건 너무나 막막했다. 심지어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더욱 소름끼쳤고. 여행을 앞두고, S와의 뉴욕데이트를 앞두고 에너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S는 무척이나 서운하겠지만 지금의 내가 그렇다. 지금도 난 무얼 말해야할지, 무얼 읽어야할지, 무얼 써야할지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 뉴욕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니. 하염없이 깜빡이는 노트북의 커서만 불안하게 지켜보며 나의 생각을 토해내기까지 꼬박 삼일이 걸렸다면, 그 막막함을 좀 짐작할 수 있을런지.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기자라는 직업을 눈 앞에 두고서 설렘보다는 긴장감이 더욱 컸다. 내 밑바닥까지 확인해야 하는 날들 앞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앞에서 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심 반드시 정규직 전환이라는 전례 없는 일을 해내겠다는 결심까지 했었으니 모든 날이 내겐 무거운 의무였다. 지난 네 달 동안 당장 앞에 닥친 일들을 해내느라, 꾸역꾸역 담아내기만 하느라 정신없었던 걸 보면. 그래서 순간순간의 생각들, 감정들을 조각조각으로 남겨둔 채 정리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S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은 더더욱 미안하고. 

 

그 '정리'를 위해서 그리고 '표현'을 위해서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하려 한다. 단지 가만히 앉은 채 겨울바람에 의지해서, 자연스레 솟구치는 욕망을 기다리고 싶다.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하는 지금 무리해서 책을 읽으려 하고, 글을 쓰려 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싶지 않다. 늦잠 자도 되는 아침이 주는 공허함, 정규직 기자가 되지 못한 아쉬움 앞에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고 싶을 뿐이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겨울바람과 하늘을 바라보려 한다. 그러다보면 욕심내지 않아도 자연스런 욕망이 솟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치열하게 배우고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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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4.12.24 00:10

    비밀댓글입니다